2013년 6월 29일 토요일

살아있는 성경 ··· 지구 창조, 그 순간으로 [성경이 증거하는 안상홍님&어머니하나님 믿는 하나님의교회]


살아있는 성경 ··· 지구 창조, 그 순간으로
 [성경이 증거하는 안상홍님&어머니하나님 믿는 하나님의교회]

성경을 사실이라고 믿습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 부정적인 반응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조차 성경에 대해 회의적인 모습이다.

어쩌다 성경이 믿지 못할 책이 됐을까. 그 이유에 대해 성경은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기 때문에 인간의 눈으론 도저히 하나님의 영역을 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고 알려준다. 그나마 현대에는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볼 수 있는 영역이 전보다 넓어졌다. 이로 인해 그동안 이해할 수 없어 허구라고 생각해왔던 성경의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지구 창조에 대한 말씀이 그렇다.

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욥기 26:7)

고달픈 삶으로 인해 하나님을 잠시 잊었던 욥-마치 우리와 같은 모습이다-에게 주신 말씀이다. 땅을 공간에 다셨다는 말씀은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과학의 발달로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과 영상을 통해 누구나 쉽게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들은 지구가 무엇엔가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언제 사람들이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바로 17세기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후부터다.

그러나 성경은 욥기서가 기록된 때, 즉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지구가 허공에 떠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실을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성경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록이며 사실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물의 순환 과정에 대한 말씀도 있다.

그가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지느니라 (욥기 36:27~28)

이러한 물의 순환 과정을 사람들이 온전히 이해한 때는 다름 아닌 16, 17세기 페로와 마리오트의 실험결과 최초 확인됐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3500년 전 정확히 물의 순환 과정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성경이 과학보다 수천 년 앞서서 기록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성경이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록이며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성경에는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수많은 사실들이 있다.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이 볼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 좁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좀 더 겸손한 자세로 성경을 대해야 하지 않을까.

2013년 6월 28일 금요일

모세의 놋뱀사건과 예수 십자가 사건[하나님의교회,안상홍님]


모세의 놋뱀사건과 예수 십자가 사건
[하나님의교회,안상홍님]

오늘날 교회들은 십자가를 세우는것을 당연히 여기고 있다.
하지만 성경은 십자가숭배는 분명 우상숭배라고 알려 주고 있다.

3500년 전 최초로 유월절을 지키던 날 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을 청산하고 탈출할 수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벅찬 감동과 감사로 이집트를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했다.

그런데 광야 노정 중 에돔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여 더 멀고 험한 사막으로 가는 데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며 모세를 대적했다. 그러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해 많은 사람들이 사막의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다. 사람들은 회개하며 모세에게 뱀들이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를 요청했다.

하나님께서 살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다.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이에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자, 뱀에게 물린 자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 살 수 있었다.

사실 놋뱀 그 자체는 누구를 구원할 만한 힘이 없다. ‘놋조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놋뱀을 쳐다봄으로 구원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놋뱀을 보면 살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만든 놋뱀이 구원해주었다는 그릇된 신앙으로 히스기야 왕 시대까지 약 1,000년 동안이나 놋뱀을 숭배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열왕기하 18:4) ※느후스단: ‘놋조각’이란 뜻.

희한하게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십자가 숭배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3:14)

모세가 만들어 달았던 놋뱀을 쳐다봄으로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단, 놋뱀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나 생명의 힘이 없었던 것처럼 십자가 자체도 아무런 힘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구약시대 놋뱀을 숭배했던 역사가 어쩌면 이리도 신약시대 십자가를 숭배하는 역사와 똑 닮아 있을까?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놋뱀이 사람들을 살렸는가?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가? 놋뱀은 놋조각일 뿐이고, 십자가는 사형틀, 나무일 뿐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교수형이나 총살형을 당하셨다면 밤마다 교회 꼭대기에는 밧줄이나 총이 불을 밝힐 것이고, 강대상과 사람들의 목에는 밧줄과 총 모양의 장식이 걸려 있을 것이다.

예레미야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곱씹어보라.

이스라엘 백성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방 민족의 길을 따르지 말아라. ··· 이방 나라의 풍습은 헛된 것이다. 그들은 숲에서 나무를 베어 목공의 도구로 다듬어서 거기에 은과 금으로 장식하고 그것을 못과 망치로 고정시킨다. 그들이 이렇게 해서 만든 우상은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말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이 운반해 주어야 한다. ··· 그것은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한다 (예레미야 10:1~5, 현대인의성경)

나무로 만들어 은과 금으로 장식한 것, 허수아비처럼 생긴 것! 당신의 머릿속엔 지금 무엇이 떠오르는가? 그것은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한다.

2013년 6월 27일 목요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비결 새언약 안식일&유월절[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비결 새언약 안식일&유월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을 믿는다면 당연히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대로 행치 않는 자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으면 구원과도 상관이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인지 살펴보자.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8)

12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베드로조차도 세족 예식을 행치 않으면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과 상관 있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자들, 하나님과 상관있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나 선지자 노릇을 해도, 권능을 행해도, 불법을 행한 자들은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 이유가 무엇일까?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마가복음 7:6~9)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과 상관 없는 자들이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은 하나님의 축복과도 상관이 없다. 그래서 헛된 경배라 하셨다. 그렇다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계명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예배 날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

예수께서 ···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누가복음 4:16)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사도행전 17:2)

하나님의 뜻대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과 상관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인 일요일 예배를 지키는 자들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마태복음 26:18~19)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이 하나님과 상관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나,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유월절에 담아 놓으신 영생과 구원의 축복과도 상관 없음은 물론이다. 하나님의 계명인 안식일, 유월절을 버리고 성경에도 없는 태양신 탄생일인 크리스마스와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을 지키는데도 전혀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가? 잘 생각해보라.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을 해도 아무렇지 않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성경에 없어도 상관 없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과 상관없는 길을 걷고 있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13년 6월 26일 수요일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




세상에는 정말 많은 교회들이 존재한다.
각기 다른 해석을 펼치며 자기교회에 와야 구원받을수 있다고 주장을 펼친다.이것으로는 결코 구별할수가 없다.
오늘 구원의 지표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통해서 진리와 거짓을 구분해 보도록 해보자.

예수님께서는 천국복음을 전파하실 때 항상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태복음 13:34~35)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는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복음사업이 어떻게 펼쳐질지 등에 대해 알 수 있다. 그중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서는 세상에 난립해있는 수많은 교회들 중 예수님께서 세우신 진리교회가 어디인지 분별할 수 있다. 다음은 가라지의 비유와 그 해석이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마태복음 13:24~30)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마태복음 13:36~43)

2천 년 전,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새 언약 복음의 씨를 뿌리고 진리교회를 세우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도시대 이후 가라지가 덧뿌려졌다. 거짓교회가 등장한 것이다.

거짓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지키기 시작했다. 일요일예배, 크리스마스, 십자가 등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복음이 아니다. 불법이다. 예수님께서 본보여주신 새 언약 복음침례(마태복음 3:13~17), 안식일(누가복음 4:16), 유월절(누가복음 22:20), 초막절(요한복음 7:2~37), 머리 수건(고린도전서 11:1~16) 등이다.

지금 내가 성경대로,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돌아보자. 크리스천이라면 어느 누구도 다른 복음을 지키는 가라지가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같이 찬란하게 빛날 의인이기를, 좋은 씨이기를 바랄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013년 6월 25일 화요일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 " 하늘나라"[어머니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교회]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향 " 하늘나라"
[어머니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교회]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자기에게 주어진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체 그져 하루하루를 살아가도 종래에는 죽음을 맞이한다.
과연 우리는 누구인가?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명언이다. 이 명언처럼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자신에 대한 성찰의 메시지는 소크라테스 이전에도 여러 차례 강조됐다. 성경에서 말이다.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전도서 12:1)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전도서 12:7)

지혜의 왕 솔로몬은 헛된 인생(전도서 1:1~11) 가운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알려준다. 육신이 본래 있던 땅으로 돌아가기 전에, 영혼이 본래 있던 하늘의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해야 한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말이다.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말씀에는 ‘본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아직 바다가 생기지 아니하였고 큰 샘들이 있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며 산이 세우심을 입기 전에, 언덕이 생기기 전에 내가 이미 났으니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에라 (잠언 8:22~26)

세상 진토의 근원인 지구를 창조하기 이전부터 솔로몬은 있었다고 했다. 어떤 모습이었겠는가. 당연히 육신이 아닌 영혼의 모습으로 존재했다. 영혼으로 있었을 때, 솔로몬은 항상 기쁨 속에서 살아갔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잠언 8:30)

우리는 하나님의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항상 기쁨 속에서 살아가던 영혼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모습으로 살아있는 동안 ‘그 모습’을 반드시 기억하길 원하신다. 왜겠는가.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브리서 11:14~16)

하늘 본향을 생각해야만 그곳에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본래 자신의 모습을 알라.
그래야 하늘 본향에 돌아갈 수 있다.


2013년 6월 24일 월요일

‘Easter day 부활절’과 ‘Resurrection day 부활절’ [새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Easter day 부활절’과 ‘Resurrection day 부활절’
 [새언약을 지키는 하나님의교회]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운명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행적을 기념하는 절기다.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임하셨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들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해 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부활절은 부활의 소망을 가진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절기이다. 그런데 부활절의 이름과 날짜 산정 방식 및 지키는 형태가 교단마다 다르다. ‘Easter day 부활절’을 지키는 교단과 ‘Resurrection day 부활절’을 지키는 교단이 있다. 이중 부활의 산 소망을 실현시켜 줄 부활절은 과연 어떤 것일까? 교리비교를 통해 알아보자.


Easter day 부활절

1. 날짜 산정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155년, 197년 두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 간의 부활절 날짜를 쟁점으로 논란이 불거졌다. 초대교회는 유대력으로 절기를 지킨 반면 로마에서는 태양의 주기를 1년으로 하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했다. 동·서방 교회의 오랜 갈등을 종식시키자는 명분 아래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니케아 종교회의를 통해 서방교회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부활절을 ‘춘분 후에 오는 만월 후 첫 일요일’에 지키기로 결의하였다.

2. 유래
오늘날 부활절을 영어로 Easter day라고 표기한다. 엄연히 Resurrection day라는 명확한 단어가 있는데도 Easter day라고 표기하는 이유는 뭘까? 이에 대한 답은 Easter라는 단어에서 찾을 수 있다.

Easter는 Eostre(에오스트레)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 단어는 튜턴족이 숭상하던 ‘봄과 풍요의 여신’을 앵글로색슨족이 부르던 이름이다. (중략) 이 이교도의 축일과 관련된 전통은 부활절 토끼와 밝게 장식된 부활절 달걀의 형태로 지금도 남아 있다. 토끼는 풍요를 상징하며 달걀은 재생을 상징한다. <누가 달을 만들었는가, 크리스토퍼 나이트, 앨런 버틀러 저>

고대 바벨론인들이 어느 날 유프라테스강 부근에 있다가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달걀을 발견했다. 이것을 물고기들이 강 밖으로 굴려냈고, 비둘기들이 품어 부화시켰다. 여기서 부화한 여신이 아스타르테다. <두 개의 바벨론, 알렉산더 히슬롭 저>

에오스트레에서 유래된 이스터 여신의 축일에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토끼와 재생을 상징하는 달걀로 축일을 지내는 전통이 있었다. 이스터 여신은 페니키아의 아스타르테와 동일 인물이다. 이 외에도 히브리의 아스다롯, 메소포타미아의 이쉬타르 등이 있다. 고대 국가에서 숭상했던 이들 여신들과 신화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었지만 달걀이 풍요, 생명탄생, 다산을 상징하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교도의 봄 축제를 예수님의 부활절에 접목시켜 기독교 안으로 들여오게 되었다. Easter day 부활절은 예수님과 상관없는 이교도의 여신 풍습에서 유래되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이 지키고 있는 부활절이 이교도의 여신 풍습이라고 한다면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부활절을 의미하는 Easter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부활 즉 Resurrection과 전혀 상관이 없다. 성경에는 부활을 뜻하는 Resurrection이 41번에 걸쳐 표기되어 있다.

사순절 기간에 달걀 사용이 금지된 까닭에 사람들은 부활절 날 부활의 기쁨을 상징하는 붉게 칠한 달걀을 상에 가져왔다. (중략) 이 관습은 그 기원을 이교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봄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경축하는 많은 이교 관습들이 부활절과 접목되었기 때문이다. <가톨릭백과사전 제5권>

이러한 이교도의 여신 풍습이 계란을 먹게 만들었는데 그 풍습이 로마 카톨릭에 들어오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이 계란에서 나온 것같이 비유하여 계란을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셨지 계란에서 부화하는 것같이 살아나신 것이 아니고 부활(Resurrection)하셨다. <바이블예언뉴스, 부활절 계란은 바벨론 풍습이다>

3. 교단
대표적으로 천주교가 Easter day를 지키고 있으며, 천주교의 교리를 답습한 개신교 5대 교파(장로교,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 등도 이를 기념하고 있다.

4. 결론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지키는 Easter day 부활절은 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에 의해 정해졌다.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교도들의 여신숭배 사상에서 유래된 이교도들의 관습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부활과 절대 함께할 수 없는 이교의 사상과 의식인 것이다.



Resurrection day 부활절

1. 날짜 산정

기한에 미쳐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로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정월 십사 일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십오 일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칠일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위기 23:4~14)

부활절은 구약의 초실절과 동일한 절기로서 날짜는 ‘무교절 후 안식일 이튿날(다음 날)’이다.

2. 유래
구약시대 초실절은 첫 열매, 즉 초실(初實: 처음 초, 열매 실)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로 초실절이라 불렀다. 처음 익은 곡식 한 단을 흔드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렸기에 요제(搖祭: 흔들 요, 제사 제) 즉, 요제절이라고도 한다. 초실절은 장차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을 보여준 모형적 예식이다. 예수님께서는 초실절 절기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무교절에 십자가에 운명하시고 돌아온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셨다.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마가복음 16:9)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린도전서 15:20)

부활 후 예수님께서는 떡을 떼시며 제자들의 가려진 영안을 열어주셨다.

그날(부활하신 날)에 저희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저희와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누가복음 24:13~31)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도 영안이 가리워 예수님인 줄 알지 못했던 제자들은 부활절의 떡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따라서 예수님의 약속이 담겨 있는 부활절 떡을 먹어야만 참된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3. 교단
전 세계에서 Resurrection day 부활절을 지키는 교회는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가 유일하다.

4. 결론
구약시대 처음 익은 열매로 제사드렸던 초실절의 절기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운명하신 후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을 기념하는 부활절이 되었다. 부활절은 ‘무교절 후 첫 안식일 이튿날(다음 날)’이다. 초실절의 처음 익은 열매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떼어주신 부활절 떡을 먹어야 한다. 그래야 영안이 열려 그리스도를 깨달아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다.

2013년 6월 23일 일요일

초림그리스도의 운명과 재림그리스도의 운명[하나님의교회,안상홍님]



초림그리스도의 운명과 재림그리스도의 운명
[하나님의교회,안상홍님]


성경은 구원자를 증거하는 책이다. 초림예수님과 재림예수님에 대하여
성경의 수많은 장면속에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이루가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육신의 운명도 예언따라 이루신다. 초림 예수님은 운명하시기 전 미리 당신이 죽임을 당하고 부활하셔야 된다고 예언하셨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누가복음 9:22)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고린도전서 15:3~4)

예수님은 성경대로 운명하셨다가 성경대로 부활하셨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다윗 왕에 관한 예언을 이루셔야 한다. 다윗은 30세에 기름 부음을 받고 왕위에 올라 40년을 통치하였다. 그리스도도 다윗의 예언대로 30세에 영적 기름부음인 침례를 받고 40년 동안 사역을 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3년간만 복음 사역을 하셨다. 다윗의 예언 중 남은 37년의 복음 사역 기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재림이 필연적이다. 37년간의 복음 사역을 완성하기 위해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도 성경대로 예언을 이루셔야 한다.

그런데 재림 예수님도 37년의 복음 사역을 마치시고 난 이후에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실까? 만일 성경 예언이 재림 때도 우리 죄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셔야 하고 3일 만에 부활하셔야 하며 하늘로 승천하셔야 한다고 예언하였다면 재림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이루셔야 한다. 그러나 재림에는 우리 죄를 위한 피흘림과 부활과 승천도 예언되어 있지 않다. 왜냐하면 초림의 목적과 재림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8)

2천년 전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담당하시는 희생 제물로 단번에 드리신 바 되기 위해 오셨다. 그러나 재림의 목적은 또 다시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해 오시는 것이 아니다. 재림 예수님은 2천년 전 피흘림으로 세워 놓으신 구원의 길이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 진리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셨다(요한계시록 5:1~5). 그렇다면 재림 때 다윗의 남은 사역인 37년 예언 기간은 어떤 예언으로 마쳐지는가? 마지막 때를 예언하신 말씀을 살펴보자.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미가 4:1~9)


왕, 모사 모두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뜻한다(이사야 9:6). 미가서는 말일에 시온의 왕으로 오신 분이 죽으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따라서 말일에 두 번째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육신의 죽으심으로 예언을 이루셔야 한다.
안상홍님도 재림 37년 예언을 마치신 후 어떤 예언을 이루실 지 미리 말씀하셨다.

동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시기가 현재라고 믿고 있으며 재림할 때는 눈, 코, 입, 귀가 달린 육체를 가지고 탄생한다고 믿는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야 할 이유로 초림예수때 세워 놓은 새 언약이 암흑세기 동안에 짓밟혔으므로 새 언약, 생명의 진리를 회복키 위해서 주님이 친히 오셔야 하고 백성과 진리를 찾아내시기 위해 다시 오셔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암행어사로 이 땅에 오셔서 37년간 복음사업을 하다가 죽어야 한다고 덧붙이고 있다. 37년간 복음사업을 펴야할 이유는 다윗의 왕위가 40년인데 초림예수님은 3년간밖에 일을 못하고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재림예수님은 37년간 복음사업을 펴야한다. (주간종교 1981년 3월 18일자)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한 자들이 모여 조롱하고 훼방할 것도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이제 네가 어찌하여 부르짖느냐 너희 중에 왕이 없어졌고 네 모사가 죽었으므로 네가 해산하는 여인처럼 고통함이냐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애써 구로하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너의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이제 많은 이방이 모여서 너를 쳐 이르기를 시온이 더럽게 되며 그것을 우리 눈으로 바라보기를 원하노라 하거니와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알지 못하며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 여호와께서 곡식단을 타작 마당에 모음같이 그들을 모으셨나니 (미가 4:9~12)

재림 예수님은 예언대로 다윗의 40년 사역 중 37년 사역을 이루셨고, 예언대로 운명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그 모략을 깨닫지 못한 자들이 시온을 치며 더럽혀지기를 원하노라 한다는 예언도 훼방자들에 의해 정확히 이루어지고 있다. 저들은 하나님의 예언과 모략이 일점일획도 어긋남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성경의 예언을 바라보았던 제자들만이 2천년 전 예수님을 영접하였듯이 지금 이 시대에도 성경 예언을 겸손한 마음과 순수한 믿음으로 믿고 바라는 자들만이 재림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6월 22일 토요일

성령과 신부가 주시는 생명수를 받으라[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교회 ]

[ 어머니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교회 ]
성령과 신부가 주시는 생명수를 받으라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물은 생명체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다. 우리 인체는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 그 물의 1~2%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며 12%가 부족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니 물을 두고 생명 그 자체라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는 우리 영혼에도 적용되는 진리다. 영혼의 생명인 영생도 생명수가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수가 없다면 우리 영혼도 심한 갈증으로 죽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생명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그날에 아름다운 처녀와 젊은 남자가 다 갈하여 피곤하리라 (아모스 8:11~13)

우리 영혼에 필요한 생명수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 시대가 하나님의 진리인 생명수를 구하지만 얻을 수 없어 영혼이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음을 예언하고 있다. 과연 생명수는 어디에서 받을 수 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 생명수를 주시는 주체가 누구인지 요한은 계시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요한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밧모섬이라는 곳에서 계시를 받았다. 천사가 모여준 미래에 대한 일들 속에서 그는 성령과 신부가 생명수를 받으라고 외치는 모습을 보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성령과 신부는 누구일까. 성령은 성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이시다. 생명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기에 이 시대 성령께서 오셔서 생명수를 주시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라 하겠다.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요한계시록 21:7~8)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 옆에서 함께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는 어떤 존재일까. 생명수를 베푸시는 주체를 알지 못하고서는 생명수를 받을 수 없기에 ‘신부’에 대한 문제만큼은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사도 요한도 이 부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10)

요한은 신부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라고 했다. 이는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낡은 성벽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생명수를 주시는 신부인 예루살렘은 누구인가?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그렇다. 생명수를 주시는 성령과 신부는 곧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시다. 성령 혼자만이 아닌 성령과 신부께서 함께 생명수를 주신다는 것은 이 시대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생명수를 받기 위해 하늘 아버지와 더불어 하늘 어머니를 믿어야 함을 뜻한다. 이와 함께 구약성경에 많은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인 하늘 어머니께서 생명수를 주실 것에 대해 예언하고 있다.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스가랴 14:8)

실지로 어떤 건물에서 물이 솟아난다면 큰 문제다. 아마도 기초공사부터 다시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스가랴 선지자는 생명수가 예루살렘성에서 솟아나 동서로 흐를 것에 대해 기뻐하고 있다. 이는 실지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시작된 생명수가 사시사철 쉼없이 흘러 넘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렇게 시작된 생명수는 더욱 그 양이 많아져 동서뿐 아니라 전 세계로 흐를 것을 에스겔 선지자도 예언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 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에스겔 47:1~5)

처음에는 발목에 오르던 생명수가 멀리 흘러갈수록 무릎, 허리까지 차 올라 나중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이는 생명수인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됐지만 마침내는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점점 더 왕성하게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 시발점이 바로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라는 것이 중요하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생명수라야 전 세계로 흘러간다. 세상의 다른 유명한 신학자나 성경 연구가가 아닌 오직 하늘 어머니라야 가능한 예언이다.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에스겔 47:12)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로부터 흘러 넘친 생명수는 결국 강이 되고 그 강 좌우에는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는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시대를 뛰어넘어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진다.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1~5)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곳은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다. 많은 선지자들이 생명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난다고 예언하는 반면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난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예언도 성령과 신부께서 생명수를 주시는 말씀과 일맥상통한다. 이는 ‘어린양의 보좌’가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그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예레미야 3:17)

하나님의 보좌는 곧 예루살렘이다. 어린양의 보좌도 마찬가지다. 사도 요한이 기록한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루살렘’이며 이는 서두에 기록한 ‘성령과 신부’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뜻한다.

에스겔 선지자가 본, 달마다 새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는 생명강이 예루살렘에서 흘러 넘치는 모습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생명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기록한 요한의 계시와 같다. 이는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생명수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통해 받을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하늘 어머니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받은 자들만이 하늘나라에서 세세토록 왕노릇함을 요한은 보았다. 누구라도 생명수를 받지 못한다면 영생도, 구원도, 천국도, 천국의 영광과 축복도 얻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 심한 갈증을 느끼는 이 시대 하늘 어머니께서는 지금 이 시간도 말씀하고 계신다.

“오라! 누구든지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

2013년 6월 21일 금요일

개신교 5대 교파 - 성결교 [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

개신교 5대 교파 - 성결교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정말 많은 교파들이 있는데요...
이러한 교파들이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오늘은 개신교 대표 교파중 성결교에 대해 알아볼게요...


찰스 카우만(좌)과어네스트 킬보른(우)


성결교는 미국에서 전래된 장로교나 감리교와는 달리 한국인들의 선교활동으로 설립된 개신교 교파다. 하지만 신앙과 사상은 존 웨슬리가 세운 감리교와 유사한 점이 많다. 그 뿌리가 감리교에 있기 때문이다.

1901년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찰스 카우만(Charles Elmer Cowman)과 캐나다 출신인 그의 동료 어네스트 킬보른(Ernest Albert Kilbourne)은 일본 도쿄에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하고 성서학원과 복음전도관을 세워 집회를 통해 직접적인 선교활동을 했다.

그곳 동양선교회를 통해 성결교의 교리를 접한 한국인 유학생들이 1907년 카우만, 킬보른과 함께 한국으로 와 서울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이 성결교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1921년 킬보른이 한국의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교단 명칭을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개칭했다.

하지만 1930년대 몇몇 교회의 목사들이 나와 미국의 나사렛교회와 연합해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나성)를 창립한다. 이후 1950년대에는 한국 교계에 일어난 에큐메니즘(교회연합운동)의 여론을 놓고 의견을 달리한 무리들이 갈라져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로 분열되었다. 1970년 초반에는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내에서 기존의 웨슬리안 신학을 이탈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독립하여 예수교대한성결교회 혁신총회(예성 혁신)를 세웠으나 1988년 다시 재결합하였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는 이 교단 출신인 만민중앙성결교회의 이재록 목사를 1990년대 초반 이단으로 규정하여 제명하기도 했다.

성결교는 이른바 사중복음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 네 가지 이념과 오순절 성령 세례를 교리의 핵심으로 삼는다. 특히 교단 명칭에 걸맞게 그중 성결을 가장 중시한다. 성결은 교인이 오순절에 받을 성령 세례를 가리키는데, 이는 성결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중생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적으로 다시 거듭나는 것, 신유는 신도가 하나님의 보호로 항상 건강하게 지내는 것 또는 하나님께 기도로써 치유되는 것, 재림은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다시 오는 것을 뜻한다. (다음 편에 계속)

2013년 6월 19일 수요일

영원한 가족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


영원한 가족


괴테는 “왕이든 농부든 가정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자성어에도 가화만사성, 즉 집안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화목한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쉽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극복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이라는 든든한 심적 버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족의 중요성은 수십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족만큼 소중한 사람들은 없다. 그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족 안에서 비할 수 없는 평안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사랑하는 부모, 형제자매가 그 수명이 다하면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가족이 소중한 만큼, 가족을 잃은 슬픔에 비할 수 있는 고통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영원토록 함께한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가족이 하늘에 있다고 알려주셨다. 이 땅의 가족은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다.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히브리서 8:5)

성경은 그림자인 육의 가족에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가 있듯이, 영의 가족에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계시고 그 자녀가 있다고 알려준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9)

오직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고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고린도후서 6:17~18)

하나님과 우리는 부모와 자녀의 인연으로 맺어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가족간의 사랑을 수없이 강조하신 것이다. 바로 하늘 가족의 존재와 그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진정한 행복과 평안은 바로 영원한 세계의 하늘 가족에서 비롯된다. 우리 영혼은 본능적으로 하늘 가족의 행복을 찾고 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1:13~1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하늘 가족과 영원히 행복과 평안을 누리며 사는 길. 바로 그 해답이 성경에 있다.



2013년 6월 18일 화요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하나님의교회,새언약 안식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하나님의교회,새언약 안식일]


안식일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이다. 안식일에 축복을 주시고 천국에 갈수 있는 축복을 주셨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라 명하신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일요일을 지키고 있다.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것인가?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35:2~3)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 했다. 심지어 불도 피워서는 안됐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지며 무릇 그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출애굽기 31:14)

실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나무를 하다가 발각되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민수기 15:32~36). 한번 생각해보자. 안식일에 일하는 게 나쁜가? 일 좀 했다고 사람을 죽이는 게 나쁜가? 사람의 생각으론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게 악행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악행이라고 여기신다.

그때에 내가 본즉 유다에서 어떤 사람이 안식일에 술틀을 밟고 곡식단을 나귀에 실어 운반하며 ··· 또 두로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하며 물고기와 각양 물건을 가져다가 안식일에 유다 자손에게 예루살렘에서도 팔기로 내가 유다 모든 귀인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어찌 이 악을 행하여 안식일을 범하느냐 (느헤미야 13:15~17)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그만큼 소중하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성경 곳곳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씀을 기록해 두셨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애굽기 20:8)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신명기 5:12)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이사야 56:2)

오늘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없다. 구약시대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 죽임을 당했던 역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영혼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태복음 7:21~23)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서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요한계시록 20:12~14)

2013년 6월 17일 월요일

행복을 찾는길 하나님의교회




행복을 찾는길 하나님의교회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탄탄한 직장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운동이나 여행, 쇼핑 등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정말 행복한가요’라는 질문에 대부분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행복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흔히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행복도 자연스럽게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세상의 부와 명예, 권력을 마음껏 누렸던 이스라엘 왕 솔로몬은 그런 인생마저 헛되다고 했다.

모든 것을 헛되고 무가치하며 의미가 없으니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구나 사람이 평생 동안 수고하여 얻는 것이 무엇인가 ···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정신을 집중하고 지혜를 모아 이 세상의 모든 일을 깊이 연구하고 살펴보았으니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운명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되어지는 모든 일을 보니 다 허무하여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다 (전도서 1:2~14, 현대인의 성경)

솔로몬은 이 땅에서 느낄 수 있는 행복이란 마치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순간에 지나지 않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하루 뒤, 혹은 한 시간 뒤 어떻게 변할 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은 이 땅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성경은 진정한 행복이란 오직 영원함이 있는 영의 세계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1:4~4)

사망도 애통도 아픔도 없는 곳, 천국! 이곳에서만이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가장 큰 본분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이제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을 듣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의무이다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은 그것이 악한 일이든 선한 일이든 지금은 비록 숨겨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전도서 12:13~14, 현대어 성경)

영원한 행복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했을 때 비로소 찾게 되는 것이다.

2013년 6월 16일 일요일

하나님의 인 유월절[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 인  유월절[하나님의교회]






인류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각종 재앙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구온난화로 나라가 물에 잠겨 가옥과 토지를 잃고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고, 해마다 강도가 더해지는 지진으로 인해 언제 삶의 터전을 잃게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또한 각종 바이러스와 새로운 변종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인해 심각한 질병이 인류를 위협하고 있고, 기아에 허덕이고 있으며, 물부족과 자원의 고갈로 인한 국가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감으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유 없는 살인과 방화를 저지르고, 학교폭력과 집단 따돌림, 성적인 문란으로 인한 사회범죄 그리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부모도, 가족도 안중에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우리의 삶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재앙의 한가운데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 지진, 기아, 질병 이 모든 재앙으로부터 당신은 과연 안전할 수 있는가? 이러한 인류를 향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인(印)'을 맞으라고 증거하고 있다.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7:2~3)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인(印)'을 맞아야 한다. '하나님의 인(印)'은 재앙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약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인(印)'은 과연 무엇인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요한복음 6:27)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인(印)’이라고 말씀하시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라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다(요한복음 6:53~54). 그리고 유월절에 먹는 떡과 포도주를 가리켜 당신의 살과 피라고 하시며 새 언약을 세워주셨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7~20)



유월절(逾越節)은 영어로 'Passover'로 '재앙이 넘어간다'는 뜻이다. 구약 출애굽 당시에도 유월절을 지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를 멸하는 재앙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출애굽기 12:1~42). 하나님께서는 지나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재앙이 난무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으로 보여주시며 유월절을 지키는 자들에게 "재앙을 넘겨주겠다"고 동일한 약속을 허락하셨다.



우리는 집을 계약할 때나 자동차를 살 때 등 중요한 계약을 할 때는 모든 문서에 도장을 찍는다. '내 것'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는 약속의 증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印)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시겠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는 유월절(逾越節)을 당신의 인(印)으로 삼으시고 지키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보증하셨다. 그리고 어떠한 재앙 가운데서도 지켜 보호해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3: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시편 91:1~7)



2013년 6월 14일 금요일

개신교 5대 교파 - 감리교 [초림,재림예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교회]



개신교 5대 교파 - 감리교

2000년전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하나님의교회입니다.그런데 오늘날에는 정말 많은 교파들이 있는데요.. 그 중 오늘은 감리교파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감리교(Methodist Church)는 18세기 영국의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해 시작된 개신교 교파다. 성공회 성직자이자 신학자였던 존 웨슬리는 영국이 신앙적인 침체기에 빠져 있을 당시,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조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 등 옥스퍼드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클럽을 조직했다. 그들은 클럽활동을 통해 성경을 연구하고 병자와 빈민, 감옥에까지 방문하여 전도에 힘썼다. 격식을 중시하고 조직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격식주의자(Methodist)’라고 불렸는데, 이는 감리교회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웨슬리는 미국에서 선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배에서 풍랑을 만났는데, 모라비아교회 신도들이 태연하게 전도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모라비아교회는 로마카톨릭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다가 파문당한 체코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의 사상을 이어받은 개신교도들이 만든 신앙공동체에서 시작되었다. 로마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독일의 보헤미아로 피난한 그들이 경건주의 신앙을 따르는 친첸도르프 백작의 후원으로 그의 영지에 만든 ‘헤른후트(‘주의 가호가 함께’라는 뜻)’라는 신앙공동체가 그것이다.


1738년 5월, 웨슬리는 모라비아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가 마르틴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면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은 웨슬리의 생애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계기로 친첸도르프 백작에게 찾아가 경건주의를 배우는데 이는 감리교 신앙에 영향을 미쳤다.


다음 해 웨슬리는 야외설교를 하여 부흥운동을 일으켰고, 이어서 영국의 브리스틀에 감리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엄격하고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며 야외설교와 조직적인 선교, 지도력으로 신도들을 모아 교회를 발전시켜 나갔다. 웨슬리가 사망했을 때 교세는 영국 전역에 확장해 있었고, 이후 조지 휘트필드에 의해 미국에도 감리교회가 세워졌다.


한국에 감리교가 들어온 것은 1885년 4월, 미국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부부가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입국하면서 시작됐다. 한 달 후에는 감리교의 의료선교사인 스크랜턴이 한국에 들어와 의료선교에도 앞장섰다. 이들은 한국인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는데, 이것이 배재학당, 이화학당이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친일파와 반일파 신도들이 분열되기도 했으나 한국전쟁 전 다시 통합되었다.


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인데, 같은 지역의 구역들이 모여 지방회를, 지방회들이 모여 연회를 조직하며, 최고기관인 총회가 있다. 감독제로 운영되는 것이 특징이다. 교리적인 특징은 칼뱅의 예정론과 반대되는 개념인 만인구원론(하나님을 믿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음)을 주장한다. 또 체험신앙을 중시하는데, 이는 단순히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는, 추상적인 신앙이 아닌 인류를 대신하여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한 구원자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감격하는 신앙을 말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중시하기도 하는데,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에 구원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행하시는 게 아닌 인간의 결단이 요구된다고 믿는다. (다음 편에 계속)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하나님께서 세우신교회 &하나님의교회] 개신교 5대 교파- 장로교 편

개신교 5대 교파- 장로교 편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세운신교회는 하나님의교회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시고 사도들이 다닌교회도 오직 하나님의교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교회와 종파들이 있을까요? 




장로교는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장로들에 의해 관리∙운영되는 교회다. 16세기 프랑스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인 칼뱅의 신앙관을 기초로 세워진 개신교 교파 중 하나다. 장로교의 교리서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칼뱅의 저서와 사상을 바탕으로 집대성되었다.



창시자 칼뱅(Jean Calvin)은 스위스 제네바의 종교개혁가, 기욤 파렐의 권유로 제네바에 체류하며 본격적인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제네바 시의회는 성찬식의 횟수를 연 4회에서 월 1회로 늘리는 것과 교회에 불성실한 신도를 파문할 권한을 준다는 칼뱅의 개혁안을 도가 지나치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칼뱅과 파렐, 시의회 간의 신경전 끝에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칼뱅과 파렐을 제네바에서 추방시켰다.



그로부터 2년 후, 칼뱅은 제네바로부터 돌아와달라는 편지를 받게 된다. 개혁가들이 떠난 후 시민들이 점점 타락해가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칼뱅은 거절했으나 간곡한 부탁으로 1년 후 제네바행을 선택했다.



그는 제네바에 도착하자마자 제네바를 ‘종교개혁의 모델 도시’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우고 새로운 교회법을 작성해 시의회의 승인을 받았다. 그리하여 제네바에는 약 20년 동안 칼뱅이 기획한, 정치와 종교를 결합한 신정정치가 이루어졌다. 칼뱅의 신정정치는 절대적이었으며 극단적인 수준의 금욕주의와 경건주의를 띠었다.



세례식 때 하품을 하거나 예배시간에 졸면 구속되었으며, 스케이트를 타면 벌금을 내야 했다. 악기를 연주하면 추방당했고, 도박이나 음주는 중죄에 해당했다. 제네바의 모든 술집은 철거되고 축제는 폐지되었다. 이단자에 대해서는 처형이 행해졌는데, 집권 초기 4년 동안 58명이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칼뱅의 장로교는 유럽 전역으로 번져 1559년에는 프랑스의 2,000여 교회가 장로제도를 받아들였다. 네덜란드, 헝가리, 독일 등에도 칼뱅의 사상이 전해졌다.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는 장로교를 국교회로 지정했으며 잉글랜드와 미국에까지 장로교를 전파하는 중심이 되었다.



18세기 이후 미국의 장로교는 해외선교에 앞장서며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에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다. 한국에는 19세기 말 첫 선교사를 파송해 장로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하나의 조직으로 운영되던 한국의 장로교는 점차 분열되어 현재 130여 개가 넘는 교단이 분파돼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 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예장 합동),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예장 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개혁,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통,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 대한예수교장로회 피어선, 대한예수교장로회 호헌 등이다. (다음 편에 계속)

2013년 6월 10일 월요일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성경이 증거하는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두 분이다 

- 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 -

성경은 심해와 같다. 깊고 오묘한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수수께끼는 성경 첫 장부터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우리’라는 하나님이다. 아니, ‘하나님들’이다.
구약성경의 원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복수명사 ‘אֱלֹהִים (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들’로 해석되는 이 표현은 구약성경 39권에 걸쳐 2500회 이상 등장한다.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엘로힘’이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단어 속에는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하나님들,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통해 당신을 왜 복수의 하나님으로 표현했는지 알려주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세기 1:26~27)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모델로 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이는 남성적 형상의 하나님과 여성적 형상의 하나님 두 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두 분의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증거는 이뿐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사역을 하시며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 속에서도 한 분이 아닌 두 분,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항상 두 분의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엘로힘’과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증거하고 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1:1~7)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오만한 인간들의 바벨탑 건설을 중단시키시는 역사를 행하시는 분도 두 분이다. 복음을 전할 사람들을 찾으시는 분도 한 분이 아니다. 이는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이 늘 두 분이 존재했다는 증거다.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다.

하늘 가족의 대표, 아버지 하나님
대개는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한복음 8:41)”, “주도 하나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에베소서 4:5~6)” 하신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아버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뜻이지, 하나님이 유일신이기 때문에 한 분만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아버지 하나님은 유일하게 한 분이라는 말씀이다. 다른 어떤 신도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 분뿐”이라고 하신 것은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반증이다.



하나님은 분명 두 분이신데, 성경은 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고 표현한 것일까.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대표성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 가정의 구성원으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을지라도 가족의 대표인 아버지의 이름만 적어 문패를 거는 이치와 같다. 누구나 아버지의 이름이 갖는 대표성 때문에 그 집에 아버지 혼자만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어머니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늘 가족에도 이처럼 대표자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고 어머니 하나님이 계신다.



또 다른 예로,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들 수 있다. 성경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5:12~19). 즉, 아담 한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고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었다. 죄를 지은 사람이 두 사람인데도 ‘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담이 갖는 대표성 때문이다. 이를 두고 하와는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하신 말씀을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을 단편적으로만 이해하여 곡해한 것이다.

엘로힘, 성령과 신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는 장면은 성경 전반에 걸쳐 담겨 있다. 다음은 성경 마지막 장에 묘사된 두 분의 구원자에 대한 기록이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22:17)



하나님께서 성령과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구원을 베푸신다는 예언이다. 성령은 아버지 하나님이다. 신부(bride)는 말 그대로 성령의 아내이니 ‘어머니 하나님’인 것이다. 다시 말해 성령과 신부는 창조 시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시며 인류를 창조하신 엘로힘,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다.



어머니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시기 위해 마지막 성령시대에 이 땅에 오셨다. 잃어버린 자녀를 찾는 일은 아버지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2013년 6월 9일 일요일

이상한 이단분별법 - 성경대로 행하는 하나님의교회

성경대로 행하는 하나님의교회는 성령시대 구원자이신 안상홍님과 하늘어머니를 믿는 교회입니다.




이상한 이단분별법


인터넷에 올라온 이상한 이단 분별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음은 어느 네티즌이 올린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한 글이다.


<이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주의해야 할 점>
1. 사람을 신격화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단이다.
2. 자기 교회나 교단만이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거나 자기 교회에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한다. 자기 교회를 자랑할 수는 있다.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라고 자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 교회에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100% 이단이다.
3. 전도는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믿는다고 하는데도 성경을 내밀고 가르치려 한다든지,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단이다.


대체로 소위 이단 감별사들이 하는 말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 방법으로 과연 이단을 분별할 수 있을까? 먼저, “사람을 신격화하면 틀림없이 이단이다”라는 문제를 성경으로 짚어보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요한복음 10:30~33)


이러한 내용의 이단 분별법을 이용한 대표적인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다. 그들은 이 기준으로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


두 번째, “자기 교회에 와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거의 100% 이단이다”라는 문제를 짚어보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4:11)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는 유일한 교회는 초대교회였다. 베드로는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두 번째 이단 분별법으로 보면 베드로는 조심해야 할 사람이며 거의 100% 이단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예수(하나님) 믿는다고 하는데도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이 이단이다”라는 내용을 살펴보자.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태복음 10:5~6)


예수님 당시 하나님을 믿는 유일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집에 가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으로 따지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가서 말씀을 전하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 세 번째 이단 분별법으로 보면 이미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 하셨으니 예수님도 이단인 셈이다.


참고로 이방에 대한 복음 전파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부터 이루어졌다. 위에 제시된 이단 분별법으로 분별한 대표적인 사람들은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이 기준으로 예수님을 이단으로 매도하였고 십자가에 못박았으며 초대교회 성도들을 핍박했다(사도행전 24:5). 결국 예수님을 믿는 교회도 이와 같은 이단 분별법으로 판별해 보면 예수님도 이단이고 스스로도 이단으로 정죄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단 분별법은 이미 2천 년 전부터 증명된, 잘못된 기준이다. 그런데 왜 이미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 이단 분별법이 2천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횡행하는 것일까.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린도후서 4:3~4)


악한 영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혼미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단 분별법은 사실은 간단하다. 성경대로 하느냐,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요한이서 1:7)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가 오히려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있다. 물론 예수께서 경고하신 대로 거짓 그리스도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짓 그리스도는 성경으로 분별할 문제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고 해서 모두 이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예수님마저도 부인하는 잘못된 기준이며 적그리스도의 미혹에 불과하다.

2013년 6월 8일 토요일

성경의 비밀, 엘로힘 하나님(하나님의교회,어머니하나님)

성경의 비밀, 엘로힘 하나님






엘로힘이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알되 힘써 알라(호 6:3)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요 17:3)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한 분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있을 뿐, 두 분 즉 엘로힘 하나님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히브리 원어에 하나님에 상응하는 용어는 크게 두 가지가 쓰이고 있는데 그 하나가 ‘엘로아흐’이고 다른 하나는 ‘엘로힘’입니다. ‘엘로아흐’는 ‘엘’과 같은 단수개념으로 쓰였고, ‘엘로힘’은 복수개념으로 구약원어 성경에서 많은 부분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즉, 엘로힘이란 ‘하나님들’이라는 뜻으로 단수로서의 하나님이 아닌 둘 이상의 하나님을 말하는 것으로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교회 세계복음선교협회는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였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한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는 남자형상의 하나님이신 아버지 하나님과 여자형상의 하나님이신 어머니 하나님이 계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 1장 26~27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을 모델로 하여 사람을 창조하시니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면, 하나님의 형상 안에 남성적인 형상과 여성적인 형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신 말씀 속에서도, ‘우리’라는 말은 분명 단수가 아닌 복수 개념입니다. 한 분 하나님이 아닌 두 분,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께서 함께 세상만물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장의 내용을 통해서도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창 11장 1~7절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세기 1장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하시며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이곳에서도 함께 역사하심으로 인간의 오만함을 꺾으시고 바벨탑의 역사를 중단시키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 우리가 내려가서 …”라고 말씀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뿐만 아니라 어머니 하나님도 존재하심을 증거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서에 등장한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알려주신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이사야 서에서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 6장 8절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러 갈 사람을 찾고 계실 때, 하나님께서는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또한 하나님 아버지 한 분만 아니라 어머니 하나님께서 더불어 함께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서에 등장한 하나님
예레미야 서에서도 엘로힘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렘 31장 22절 “…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새 일을 창조하시겠다고 하시고, 여자가 남자를 안는 일이 새 일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적인 안목으로 볼 때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자(하와)는 원래 남자의 갈빗대로 남자의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의 갈빗대를 뽑아 여자를 만드시지 않으셨다면 어찌 남자의 안에 있던 여자가 남자를 안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겠다고 하신 새 일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 속에 내재하심으로 그간 드러나지 않던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는 전대 미문의 일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 일’은 새 언약을 세우심으로 세상에 창조됩니다.
렘 31장 31~34절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언약을 세우리라 …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라는 부분에서 히브리 원어 성경에는 ‘하나님’이 ‘엘로힘’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새 언약을 통해 우리가 엘로힘의 하나님을 깨닫게 될 때,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더 이상 “너는 하나님을 알라”고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내용을 통해서 볼 때 새 언약 진리 안에는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 곧 엘로힘의 하나님께서 계셔야만 우리가 비로소 새 언약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을 영접하고 있기에 성경에 기록된 새 언약의 자녀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기약이 이르면 나타나겠다’예언하신 하나님
영으로 우리 구원을 위해 사역하시는 하나님께서 기약이 이르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딤전 6장 15절)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시는지 계시록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계 22장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늘 ‘우리’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고 표현하신 그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실 때에는 성령과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생명수를 주시고 계십니다. 성령과 신부께서 우리에게 생명수를 주실 수 있는 것은, 창조 시에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시며 인류를 창조하신 바로 그 엘로힘 즉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에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생명)이 있다고 하셨습니다(딤전 6장 16절). 즉, 재림 그리스도 안상홍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하늘 예루살렘 어머니에게만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우리도 생명을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장 53절) 하셨고 또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장 22절) 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들은 살았다고 말할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즉, 생명 그 자체를 스스로 가지고 있지 못한 존재들이기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하늘 아버지 안상홍 님과 하늘 어머니께 나아가야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수를 허락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시대에 아버지 하나님이신 성령 안상홍 님과 신부 예루살렘 어머니로 이 땅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분을 하나님의 교회는 구원자로 영접하였습니다. 누구든지 더 자세한 말씀을 알고 싶으시면 가까운 하나님의 교회를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2013년 6월 5일 수요일

하나님의교회의 정통성

하나님의교회 역사는 기독교회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기독교회사가 곧 하나님의교회 역사임을 2000년 전 예수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살펴보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마가복음 1:1~10)

기독교의 시작점은 예수님께서 침례를 받고부터다. 당시 이스라엘은 유대교를 믿었다. 유대교는 그들 고유의 신앙으로 뿌리가 깊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구원자라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기독교는 신흥종교였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으로 치부하며 배척했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았다. 유대인들의 섣부른 판단으로는 예수님만 없으면 그리스도교는 자연히 몰락할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사형을 하루 앞둔 날 마가의 다락방으로 열두 제자를 부르셨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새 언약의 법을 세워주셨다. 이날이 바로 우리들이 최후의 만찬으로 알고 있는 ‘유월절’이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일이 이른지라 ···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 22:7, 19~20)

유월절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로마와 유대인들의 결탁에 의해 십자가형을 받으셨다. 유대인들은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됐다. 수장의 죽음으로 무리들은 당연히 흩어질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열정으로 불타게 했고 결국 120명의 사도들은 유럽과 아시아 각지로 흩어졌다.

본격적인 초대교회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실질적인 교회가 세워진 것은 아니었다. 초대교회가 건물이라는 형태를 갖춘 것은 AD 100년이 넘어서다. 그전에는 House-church(가정예배) 형태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로마의 박해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수중에 있었다. 로마는 태양신을 섬기던 다신교 국가로, 최고의 권위가 황제였다. 로마 시민은 누구든 국가의 모든 일에 복종해야 했다. 물론 기독교인들 역시 국가에 충성했지만 한 가지,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서는 로마 황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눈엣가시였다.

더욱이 로마 제국은 국가 통합의 목적으로 여러 신들과 함께 황제에게도 예배하는 종교가 성행했는데, 이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은 국가에 충성하지 못한 자들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결국 로마의 황제들은 기독교 탄압정책을 펼쳐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초대교회는 대체로 House-church를 유지하며 그들의 믿음을 지켰다. 그렇다고 교회 이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에 있는 교회로 편지를 보내며 교회 명칭을 언급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고린도전서 1:2)

로마의 탄압을 피해 가정으로 전전하며 예배를 드렸던 초대 기독교, 그 이름이 바로 하나님의교회다. 즉,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하나님의교회의 역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기독교는 로마의 눈을 피해 믿음을 지켰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한 로마의 탄압은 갈수록 거세졌다.

폭군으로 유명한 네로 황제(재위 기간 54~68년)는 무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학살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해가 지면 등불 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기간 284~305년) 황제 때에는 칙령을 반포해 기독교인들의 예배소를 헐고, 성경을 불태우며 기독교인들을 옥에 가두었다. 이 시기 기독교인들은 채찍질을 당한 뒤 피에 굶주린 맹수의 밥으로 던져지거나 화형을 당하고, 사지가 찢기는 등 끔찍하고 야만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시신은 방치되었다가 불에 태워지거나 강에 던져졌다.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로마 제국은 정부의 위력으로 기독교를 박멸하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카타콤(지하무덤)에까지 숨어 들어가 예배를 드리며 믿음을 지켰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탄압을 피해 예배드렸던 장소, 카타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탄압을 피해 예배드렸던 장소, 카타콤.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내놓은 종교정책은 ‘종교의 자유’였다. 로마는 종교적 관용책을 펼치며 타 종교에 대해 묵인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은 단지 로마의 정치성향일 뿐이었다. 통치 차원에서 로마는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베풀었으나 언제든지 필요하면 특정 신앙을 박해하거나 탄압할 수 있었다. 그 대상이 바로 기독교였다.

갈수록 거세지는 탄압 가운데서도 기독교는 로마제국 전체로 전파됐다. 처음에는 평민이나 노예 중심으로 퍼져나갔으나 점차 상류층에서도 하나 둘 기독교를 믿는 무리가 생겨났다. 상류층의 입교는 기독교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이 무렵부터 신도들이 모이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3세기 말 무렵에는 전체 로마 인구 중 10%가 기독교인이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박해를 견딘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더없는 평화가 찾아온 것이다.

이와 함께 기독교를 심하게 박해하던 갈레리우스는 311년 임종 직전 기독교를 인정하는 칙령에 서명했다. 기독교의 승리였다. 이보다 더 큰 기쁨은 다음 해에 찾아왔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에서 내린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했다. "모든 기독교도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 이 짧은 문장은 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비로소 기독교는 347년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이르러 국교로 인정받았다. 탄압의 세월을 보내고 찾아온 눈물 겨운 결실이라 볼 수 있지만 사실 이 역사는 기독교의 타락을 가져왔다. 다시 말해 기독교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교리가 이교도화돼버린 것이다.

이 무렵 하나님의교회 즉 기독교는 서서히 파벌이 생겼다. 성경대로 행해야 한다는 동아시아 교회와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묵인해도 된다는 로마교회였다. 결국 로마교회는 인본주의라는 독단적인 길을 가게 됐다. 반면 동아시아 교회들은 성경을 위주로 하는 신본주의 사상을 고수했다. 두 지역 교회의 교리 논쟁은 AD 155년 유월절 논쟁으로 촉발됐다. 로마교회 지도자인 아니케터스와 동아시아에 있던 서머나교회 감독인 폴리카르푸스(폴리갑)가 서로의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각자 유월절을 지키기로 했다.

당시 로마교회는 성경대로 유월절을 지키지 않고 있었다. 성력 1월 14일 저녁에 행하던 성찬식을 부활절에 같이 실행했다. 이런 로마교회의 새로운 관습은 성경대로 행하던 다른 지역 교회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이후 197년 로마교회 감독이었던 빅터가 ‘도미닉의 규칙’이라는 법을 만들어 모든 기독교에 유월절 성찬식을 부활절에 하도록 강요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들은 빅터의 결정에 따랐지만 동아시아 교회들은 모두 거부했다. 동아시아 교회 중 에베소교회의 감독 폴리크라테스는 빅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사도 빌립, 사도 요한을 비롯한 여러 순교자들이 1월 14일을 유월절로 지켰으며 8대 감독인 자신도 전임 감독의 가르침대로 유월절을 지킨다고 강조했다.

결국 유월절은 AD 325년에 폐지됐다. 두 교리 간의 역법(曆法) 차이로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이 또한 교리의 이교도화가 가져온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급격하게 로마교회의 교리는 변질됐다. AD 321년 일요일 휴업령으로 성경의 안식일을 버렸고, AD 354년 크리스마스를 유입시켰으며, AD 586년 십자가상을 도입했다.

교리의 변화와 함께 논쟁이 거세질 즈음 군사적 약화와 내부적 혼란을 겪고 있던 서로마 제국으로 게르만계의 여러 부족이 대규모로 이동했다. 4세기 말 훈족의 서진(西進)에 자극을 받은 게르만민족은 서로마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제국 각지에 정착하면서 여러 부족왕국을 건설했다. 이 시기 비록 서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로마교회는 건재했다.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틴으로 수도를 옮긴 뒤 서로마가 멸망하기까지인 약 100년 동안 로마교회는 나름대로 살 방법을 모색했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후 여러 미개한 부족들은 왕국의 번영을 위해 로마교회와 손을 잡았다. 그중 재빨리 로마교회로 개종한 프랑크왕국은 처음부터 로마교회를 옹호하므로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로마교회에 정면으로 반대하던 나라 중 세 나라(헤룰리, 반달, 동고트)는 로마감독의 농간에 차례차례 멸망당하고 말았다.

성경적 진리를 버리고 이교도의 길을 걷고 있던 로마교회는 다른 게르만민족들을 포교할 목적으로 우상을 세우고, 교회를 웅장하게 꾸미기 시작하며, 타 민족의 풍습을 더욱 과감히 받아들였다. 각 지역의 문화적 특색처럼 등장하는 교회지붕, 스테인드글라스, 촛불, 성상숭배 등을 들 수 있다.

로마교회의 위상은 이때부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급기야 506년에는 동로마 황제까지 정책적으로 로마교회를 지지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로마교회의 감독을 교회의 우두머리라는 칙령을 반포하는 한편 591년 ‘교황’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천주교황의 탄생이었다. 기독교의 세속화는 결국 종교적 괴물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대는 로마카톨릭이 지배하는 종교 암흑시대로 치달았다.

AD 538년 교황은 적대 세력이었던 아리우스파의 동고트를 정복함으로써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지게 됐다. 그 종착점은 1798년 프랑스 혁명군이 교황 피우스 6세를 발렌스 성으로 유배시킨 때까지다. 이제 참다운 기독교인 하나님의교회는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도 사라진 후 교회는 교황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로마카톨릭의 부패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교황직의 매매와 세속적 권력, 축첩, 간음, 사치, 정적 살해 등의 비리는 특정한 때, 특정 교황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다. 교황과 성직자들의 음란한 생활은 속담과 풍자로 민중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급기야 교황 레오 3세 때는 죄에 대한 벌을 사면해준다는 조건으로 금전이나 재물을 받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면죄부’가 그것이다. 800년경에 판매가 시작된 면죄부는 15세기에 발행량이 급격히 늘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이처럼 천주교가 부패의 일로를 걷고 있을 무렵, 독일의 광산 노동자에게 한 아들이 태어났다. 신학 교수를 거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사상을 만든 사람, 바로 마르틴 루터다.

루터는 어느 날 수도사인 존 티첼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동전이 그릇에 떨어져 땡그랑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루터는 티첼의 면죄부 판매에 분개했다.

로마교회의 타락을 보며 실망했던 그는 당시 대주교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믿는 자의 전 생애가 회개 과정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라며 반박문을 보내고 교회의 문에 95개조에 달하는 긴 서한을 내걸었다. 비로소 종교개혁의 시작이었다.

그 후 프랑스의 칼뱅, 스위스의 츠빙글리 등 다양한 종교 개혁가들이 등장했다. 천주교에 뿌리를 두고 있던 이들은 종교개혁과 아울러 천주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신교다. 천주교에서 분리되어 발생했다고는 하지만 교리적 측면에서 별반 다른 것이 없었다.

대중들은 천주교나 개신교나 하나님을 믿는 곳이라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정통 기독교는 천주교나 개신교가 아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새 언약 유월절을 세워주시며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리라’ 하신 교회는 바로 하나님의교회다. 사도들도 다녔으며 그의 제자들도 죽음을 불사하고 지켰던 하나님의교회. 하나님의 정통성을 고수하며 초대교회 사도들의 믿음을 지키는 그 하나님의교회가 1964년 안상홍님에 의해 복권됐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브리서 9:27)

인류가 바라는 구원을 주시기 위해 두 번째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그로 말미암아 2000년 전 사라졌던 하나님의교회가 수복된 것이다. 2000년의 세월 속에 수많은 종교가 생겨나고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도 생겨나며 사라지고 있다. 종교의 홍수 속에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정통 기독교를 만나고 싶다면 처음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했던 새 언약 유월절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십자가 운명 이후 AD 325년 폐지되므로 종교인의 마음에서 사라졌던 유월절. 그 유월절 진리를 가지고 있는 정통기독교가 바로 하나님의교회다.

2013년 6월 4일 화요일

세상이 기다리는 하늘어머니(하나님의교회,엘로힘하나님)

세상이 기다리는 하늘어머니


하나님의교회는 엘로힘하나님, 즉 성령과신부이신 아버지하나님과 어머니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엘로힘하나님은 하나님들이라는 뜻으로 성령과신부이신 아버지하나님과 어머니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교회는 엘로힘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있으며 믿고 있습니다.
모든 만물의 이치를 통해 알려주신 하늘어머니의 존재를 하나님의교회에서는 열심히 전하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엘로힘하나님 성령과신부되시는 안상홍님과 어머니하나님을 전하는 하나님의교회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교회 세상이 기다리는 하늘어머니 (엘로힘하나님, 성령과신부)


영국문화협회가 세계 102국, 4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어 단어는 'Mother(어머니)'였습니다.
설문 결과가 단지 단어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엄마'에 대한 느낌은 동서양을 막론한 공통된 정서입니다.


갈 4장 26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하늘어머니와 자녀 간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천륜은 이 땅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 그 품을 떠나와 곤고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처지지만
우리는 예루살렘 하늘어머니께 세상 어디에서도 받을 수 없는 각별한 사랑을 받던 천사들이었습니다.
(잠 8장 22~26절, 욥 38장 4, 7절)

차고 넘치는 천상의 사랑을 받다 내려온 존재들에게,
진실한 사랑을 찾아보기 힘든 세상살이는 고달플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살면서도 고독과 공허함을 하소연하는 목소리들이 점점 높아져만 가는 이유입니다.

요즘 사방에서 불고 있는 힐링 열풍은 그 영혼의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하지만 어떤 힐링도 일시적인 위안은 될지언정 근본적인 욕구 충족은 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공허함을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은 내 영혼을 낳아주신 하늘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세상에서 지친 우리 영혼은 오랫동안 하늘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해왔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영혼들을 곁에서 눈동자처럼 보살피시며 무한한 은혜를 베푸시던 하늘어머니의 사랑을
영혼은 어렵풋하게나마 기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하늘어머니가 갖고 있는 기억은  매우 뚜렷합니다.

사 49장 14~16절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고..."

예루살렘 하늘어머니는 자녀들을 한시도 잊으신 적이 없습니다.
생기로 호흡을 지으시던 순간부터 함께했던 아들딸들이 죄를 짓고 하늘 본향을 떠나,
인생의 수고와 슬픔 속에서 눈물짓고 있는 것도 다 아십니다.
그 눈물을 닦아주시기 위해 이 시대의 구원자 성령과신부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신부이신 하늘어머니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 66장 13절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하나님의교회 세상이 기다리는 하늘어머니 (엘로힘하나님, 성령과신부)


이 세상은 하늘어머니의 사랑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아직까지 외롭고 지친 마음을 달랠 길 없이 힘겨워하고 계십니까?
엘로힘하나님 성령과신부로 이 땅에 오시어 자녀들을 참사랑으로 참생명으로 위로해주시는
안상홍님과 어머니하나님을 만나보십시오
안상홍님과 어머니하나님을 전하는 하나님의교회에서 그 참행복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하늘어머니의 품으로 위로와 사랑을 받아야 우리의 영혼이 참행복을 느낍니다.

하늘어머니의 품으로 달려오시길 바랍니다.